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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라워 킬링 문 후기 - 담백한 평양냉면 같은 영화 - 순수 vs. 위선

bonanza38 2023. 10. 20. 11:17

언젠가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회자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를 물었던 것 같다. 최인호의 답변은 "아무런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소설을 쓰고 싶다"였다.

 

기교가 없는 초등학생 같은 글. 그것은 무엇일까? 대중 소설가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대가의 말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딱히 손에 와닿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3시간 26분의 장편 서사시 '플라워 킬링 문'을 보면서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영화'가 무엇인지 눈으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평양냉면을 처음 먹어본 사람들이 느끼는 상반된 반응처럼 심심하지만 담백하고 오묘한 맛을 이해하는 사람과 밍밍한 맛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으로 나뉠 것 같은 영화 '플라워 킬링 문'. 

 

100여 년 전 인디언(네이티브 아메리칸)과 백인들의 순수와 위선, 그리고 사랑과 배신의 대서사시가 철 지난 옛이야기가 아닌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작금의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 영화 제목 '플라워 킬링 문'제대로 선택한 것일까?

논픽션 소설 'Killer of the Flower Moon' 저자 데이비드 그랜 인터뷰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원제가 'Killers of the Flower Moon'이다. 이것은 데이비드 그린 작가의 원작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제대로 선택한 제목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잘못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그랜의 소설 'Killers of the Flower Moon'에서 'flower killing moon'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커다란 달 아래 큰 식물이 작은 꽃의 빛과 물을 훔치는 5월을  '꽃을 죽이는 달'의 시기라고 부른다는 언급이 나온다. 

 

즉 이 영화의 제목을 '플라워 킬링 문'이라고 한다면 인디언 말로 5월이라는 시기를 강조한 것이다. 물론 꼭 영화 제목이 영화 전체를 아우를 필요는 없지만 '플라워 킬링 문'은 이 영화의 전체 맥락과는 맞지 않다.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민족인 오세이지족을 'flower moon'으로 상징화하고 그들을 죽이는 사람을 의미하는 'Killers of the Flower Moon'이 이 영화 전체를 조망하는 가장 적절한 제목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의 원제는 이 제목을 선택한 것이다. 

 

즉 'Flower Killing Moon'을 제목으로 선택하면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시스템을 의미하는 것이고 'Killer of the Flower Moon'은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떤 것이 이 영화의 맥락에 맞는지는 관람을 하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물론 '플라워 킬링 문'에 상징성을 부여하여 큰 식물이 작은 꽃을 죽이는 시기처럼 오클라호마의 그 시기는 위선적인 사람들이 순수한 사람을 죽이는 시기였다고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Flower Killing Moon'이라는 제목도 이해하기 힘들다면 굳이 원제를 바꾸어 영화의 맥락을 손상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이 간다. 더욱이 큰 식물이 작은 꽃을 지게 하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탐욕이 야기한 인위적 조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은 적확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 마티의 '아이리시맨'에서 느끼지 못한 심심하지만 담백한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영화 '플라워 킬링 문' 주연 로버드 드 니로 - ParamountKR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전작인 '아이리시맨'은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제시 플레먼스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지만 개별 식재료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잡탕밥 같은 영화였다. 

 

하지만 이번 '플라워 킬링 문'은 달랐다. 어쭙잖은 양념에 의존하지 않고 아주 잘 끓인 육수나 잘 우려낸 동치미 국물에 기반한 평양냉면의 맛이 난다. 

 

그리고 갑자기 피카소도 떠오르기도 했다. 마치 어린아이 그림 같은 순수한 작품을 보면서 회화적 기교를 배제하고 인간 내면에 천착한 거장의 풍모를 느끼듯이 누아르의 양념을 거둬내고 인간 내면에 초첨을 맞추는 담백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한 마티의 순수한 열정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불호도 나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심심한 평양냉면의 심오한 맛을 선호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처럼 같은 영화를 보고도 매우 다른 감상평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수위선, 사랑 배신대서사시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의 주연 레오나드로 드카프리오 - ParamountKR 스페셜 예고편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100여 년 전 지금은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는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 Correctness) 이름을 부여받은 과거 '인디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과 백인들의 순수와 위선의 역사를 다룬 한 편의 대서사시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이 등장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FBI의 존재 의미가 부각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던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부분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했는데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아내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 분)가 워싱턴 D.C. 를 방문해서 대통령에게 오세이지족의 연쇄 살인에 대해 청원하는 장면에서 전설적인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을 뒷모습으로 담백하게 처리한 부분도 역설적이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자연의 섭리를 믿고 그 섭리대로 살아가는 순수한 네이티브 아메리칸 오세이지족에게 닥친 석유라는 행운이 가져오는 역설과 그 행운의 물줄기를 돌리려는 위선적인 백인들의 모략을 다룬 작품이다. 

 

100여 년 전의 미국에서 존재했던 인종 간의 차별과 이를 초월하는 자본의 힘, 그리고 그 자본을 빼앗으려는 권모술수. 100여 년이 지났지만 이 소재들은 사라지지 않고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도 유효한 역사적 지체의 모습을 보며 역사적 진보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혹스럽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그 권모술수의 화신, 백인들의 위선을 대표하는 인물 윌리엄 헤일(로버트 드 니로 분)의 전사를 다룬다면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요소가 더 두드러졌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과감하게 이 부분을 생략했다. 

 

이 영화를 '순수와 위선'의 구도에서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강한 의지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동화처럼 결국은 선은 악을 이겨낸다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아주 담백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그의 의지가 다른 불필요한 기교를 제거하도록 이끌었던 것 같고 오히려 이 점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무성영화 시대 변사를 떠올리게 하는 퍼포먼스는 끔찍하고 위선적인 일당들의 최후를 순수하고 담백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영화적 일관성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카메오는 이 영화가 수 십 년 간 미친 듯이 영화에 탐닉하면서 살아왔던 마틴 스코세이지 자신에게 보내는 헌사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상질물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사랑과 배신의 영화이다.

어니스트의 배신을 알고도 몰리는 왜 사랑의 끈을 놓지 못했는지 그 비밀은 단 한 단어로 설명된다. "인슐린".

 

"인슐린"이라는 대사는 줏대 없고 기회주의적인 어니스트의 내면을 드러낸 대사이지만 이 말까지 확인하려는 몰리의 마음까지도 전달하는 결정적인 키워드였다.

 

끝까지 순수했던 사랑을 갈구했던 인물과 탐욕과 사랑의 중간 어디쯤인가에서 방황했던 인물 사이의 갈등도 이 영화의 큰 축을 형성하는 중요한 핵심 요소이다. 사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이 영화는 더욱 밍밍하게 느껴질 것이다. 

■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의 쿠키 영상 유무와 평정

206분 영화를 다 보고 쿠키 영상까지 봐야 한다면 고문이다. 쿠키 영상은 없다. 

이 영화를 통해 마틴 스코세이지의 뚝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나이와 연륜이라는 관성에 기대지 않고 창의적인 새로운 시도를 한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역시 마틴 스코세이지는 멜로에 약한 감독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몰리의 순수한 사랑과 어니스트의 반쯤 순수한 사랑에 대해서 좀 더 디테일한 연출을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 평점

 

전체적으로 절제미와 담백함이 뛰어난 작품이지만 시간에 비하면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은 편집 호흡의 문제와 전술한 사랑에 대한 연출 문제로 박한 평점을 준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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