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솔직 후기 - 관객이 빈 공간을 채워가는 영화

bonanza38 2024. 3. 24. 00:23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매우 익숙한 소재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바로 그런 익숙한 소재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인연과 전생이다. 

전생은 영어로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로 표현되었지만 인연은 카르마(karma)라는 영어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 한국어 '인연'으로 설명했다. 

 

카르마는 부정적 이미지는 '업'이라는 이미지도 있어서 긍정적 이미지인 '인연'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는 한국어 '인연'밖에 없다는 감독의 판단이었던 것 같다. 

 

영화는 지루하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12세 관람가 영화지만 12세는 지루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15세 이상이라면, 한 번쯤 첫사랑의 아득한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영화 속 빈 공간을 빼곡히 스스로가 채워가는 영화일 것이다. 

 

개봉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꾸준히 관객을 소구 하는 것도 빈 공간을 기꺼이 채워가려는 관객들의 입소문 때문일 것이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 보면서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던 피천득의 '인연'이 떠올랐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처럼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비슷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노라(그레타 리 분)와 해성(유태오 분)은 세 번의 만남을 갖는다. 두 번째 만남은 직접적 만남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만남이 피천득의 '인연'과 동조화되는지 아니면 다른 전개가 이어지는지 직접 영화관에서 확인하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 감독에 대해서는 다음 영화까지 평가를 미루고 싶다. 자기 이야기를 가장 먼저 연출하고 싶은 신인 감독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셀린 송 감독이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소재로 선택한 이상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속도와 전개지만 기발함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영화에서 셀린 송 감독의 기발함을 기대해 본다. 

 

■ 지루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영화 - 관객이 빈 공간을 채워가는 영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메인 예고 -CJ ENM Movie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12세 관람가이다. 

하지만 12세 아동이 이 영화를 보면 아마도 지루할 것이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15세 관람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한 번쯤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영화의 빈 공간을 스스로 채워가면서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어쩌면 감수성이 예민한 12세 이하 관객이라면 그런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15세 이상이라도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노라(그레타 리 분)와 해성(유태오 분)과의 12년의 간극을 둔 세 번의 만남을 그려나간다. 시간에의 노스탤지어로 먹먹함을 저변에 깔고 피부로 접촉하지 않은 두 번째 만남을 넘어 24년 만에 만져보는 첫사랑의 감촉을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다. 

 

세 번의 만남. 

교과서에서 수록되었던 누군가의 수필이 떠오른다. 그 수필에서는 마지막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 또 다른 생을 위한 겁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Official Trailer - A24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도 세 번의 만남이 있다. 

피천득이 초등학교 1학년 아사코와 첫 만남을 가졌던 것은 17살이었다. 

 

동갑인 노라와 해성이 만남을 가졌던 나이는 12살이었다. 해성의 애틋함과 다르게 욕심 많은 노라의 마음속 공간에는 캐나다 이민을 가는 순간까지 해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후 피천득은 대학생이 된 아사코를 만났고, 노라와 대학생이 된 해성도 랜선을 통해 만남을 가진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라의 욕망은 12년 만의 만남에 쉼표를 찍는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 

피천득은 30대가 된 아사코를 만난다. 일본계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아사코는 마치 시들어가는 백합처럼 보였다.

 

피천득은 이 마지막 만남을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노라와 해성의 세 번째 만남은 어땠을까? 

 

인연을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의미가 혼재하는 영어 단어 카르마(karma - 업, 인연)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 '인연'을 사용한 것이 하나의 복선일까? 

 

영화에서는 8000겁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전생(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옷깃을 스칠 수 있다는 500겁의 인연

 

한 나라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1000겁의 인연

하루 동안 같은 길을 동행할 수 있다는 2000겁의 인연

 

하룻밤 한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3000겁의 인연

한 민족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4000겁의 인연

 

한 동네에 태어날 수 있다는 5000겁의 인연

하룻밤을 같이 할 수 있다는 6000겁의 인연

 

부부의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7000겁의 인연

그리고 부모 자식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8000겁의 인연

 

한 겁은 가히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이다. 1 유순(약 15km)되는 철성 안에서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한 알씩 꺼내어 이 겨자씨를 모두 꺼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는 긴 시간으로 비유된다. 

 

노라와 해성은 다음 생을 위해 얼마만큼의 겁을 쌓은 것인가? 그리고 다음 생에서는 노라와 해성은 어떤 인연으로 또 다른 만남을 가질까?  영화관을 나오면서 필자를 스쳐갔던 수많은 인연을 곱씹는 여운이 상당 시간 지속되었다. 

 

■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평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빈 공간을 기꺼이 채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관객과 그렇지 못한 관객 사이에 간극이 있는 영화이다. 빈 공간을 채웠던 관객의 입소문으로 개봉 후 상당 시간까지 관객을 소구하고 있다. 

 

사전에 영화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이지만 감독의 자전적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 되었다.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상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속도와 전개는 납득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감독과 노라의 일체화 때문에 기발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 감독에 대한 평가는 다음 영화로 미루어도 좋을 듯싶다. 자신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뛰어넘을 다음 작품에서 셀린 송 감독의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필자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빈 공간을 기꺼이 채웠지만 그런 수고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관객의 입장을 고려해서 약간은 박한 평점을 주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평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