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홍범도 장군 논란 총정리 - 아직도 독립투쟁은 진행중

bonanza38 2023. 9. 4. 20:36

최근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 지청천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 흉상을 철거, 이전한다는 난데없는 논란이 불거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멸사봉공한 독립투사들의 얼을 잘 기리는 것도 부족한 마당에 그들을 기리는 흉상을 철거한다는 미증유의 사태에 역사적 인식을 공유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한탄을 넘어 분노심을 표출하고 있다. 논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 해군 역사상 매우 드물게 홍범도함의 명칭을 변경하려는 시도까지 국방구에서 획책한다는 소리에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독립 투사 5인 흉상 (좌측으로부터 홍범도 장군, 지청천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

조국을 위해 헌신한 홍범도 장군 -홍범도 기념 사업회 참조

여천(汝千) 홍범도 장군(1868~1943)은 지금의 수원과 화성 일대의 지역 남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주일 만에 아버지는 아홉 살 되던 해 돌아가시고 의지할 곳이 없던 홍범도 장군은 남의 집 머슴으로 빈곤, 천대, 학대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다섯 살에 머슴보다는 군인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평양 감영 소속 부대 나팔수가 된 것이 그의 첫 군생활이었다. 이것은 후에 의병과 독립군 생활을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부패한 군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상관을 죽이고 탈영하여 직장을 얻었지만 그곳에서도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금강산 신계사에서 지담 스님의 상좌로 삭발승이 되었다. 이곳에서 홍범도 장군은 지담 스님의 설법으로 평안을 찾는 동시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구국항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항일 의식을 키우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배우자 단양 이 씨를 만나 절을 떠났지만 건달패 무리를 만나 아내와 헤어지고 강원도 회양에서 포수가 되었다. 그의 초년의 삶은 그야말로 평범을 허락하지 않은 비루하고 초라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의 삶의 변곡점이 된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시해 사건 후 나라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황해도 서흥 출신 포수 김수협을 만나 의병 활동의 뜻을 품게 된다. 이후 그의 항일무장 투쟁의 역사는 시작된다. 

초라한 화승총으로 무라타 소충으로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1895년 철령에서 섬멸하는 첫 승전보를 올린 후 뜻을 같이 하는 포수와 농민을 규합 의병대장 유인석의 부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세 차례 연속 패배하고 동지 김수협도 전사해 그는 황해도 연풍의 금전판 노동자로 은신한다. 하지만 그를 추적하는 일본군과 밀정 때문에 그는 변방을 향한다. 함경도 덕원을 지나 결국 북청까지 이른다.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아내와 재회하고 자신의 아들과도 조우한다. 그리고 둘째 용환까지 얻게 된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가족의 따뜻함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평안도 양덕, 성천, 영원 등을 누비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한 때 강력한 일본군에 밀려 다시 농사와 사냥으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러일전쟁 직후 한국에 상륙한 일본군의 본격적 항일 세력 축출 작업으로 1904년 투옥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탈옥해서 다시금 의병의 깃발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후 의병 대장 홍범도의 활약은 본격화한다.

일본의 침탈이 심화되면서 그는 결국 조국을 떠나 1908년 중국 길림과 1909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국외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의병 부대 간 알력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처단을 계기로 의병활동은 다시 활력을 되찾고 전열을 정비한 홍범도 장군도 1910년 4월경 30여 명의 의병과 국내 진입 작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하고 대부분의 동지가 체포된 상황에서 홈범도 장군은 천신만고 끝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이후 1920년 5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한다. 독립군 연합부대는 32차례나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드디어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일본군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독립전쟁 첫 승리를 이끌어 냈다.

봉오동 전투 이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을 비롯, 대한국민군, 대한의군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군 등의 군대가 연합하고 드디어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까지 통합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였다. 전과는 대단했다. 일본군 1,254명이 전사자와 200여 명이 부상자를 만들어냈지만 독립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독립군은 물론이고 민간인까지 무차별 학살하고 재산을 파괴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킨다. 1920년 10월 말부터 시작되어 1921년 봄까지 대학살은 이어졌다. 5천여 명의 한인들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간도에서 더 이상 독립 전쟁의 수행은 어려웠고 간도 기지를 기반으로 국내 진입 후 독립 쟁취를 하겠다는 희망도 사라졌다. 

결국 러시아로 근거지를 옮겼지만 러시아의 한인 적대정책이 강화되고 1931년 만주사변과 1933년 일본의 만주국 수립으로 스탈린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주 이주시킨다. 홍범도 장군이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1920년대에 장군은 레닌의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강제 이주 시키고 한국전쟁의 책임이 있는 스탈린의 공산당원으로서 독립전쟁을 치른 것은 아니었다. 지금 역사 논쟁에서 단순히 공산당 가입 사실만 가지고 한국 전쟁에 마치 홍범도 장군도 책임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몰지각한 이념 논쟁은 무지의 소산이다. 

그가 1941년 소련 정규군에 입대를 요청한 것도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독일을 타도하는 것이 동맹국인 일본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독립 전쟁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 73세의 노구로는 정규군이 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레닌 기치'에 '원수를 갚다'라는 기고문을 실어 자신의 투쟁사를 소개하며 러시아 젊은이에게 조국 수호에 진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 조선극장 경비 책임자로 일을 하면서 그의 삶과 항일 투쟁의 역사를 기록해 줄 것을 요청해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지고 연극 '홍범도'가 1942년에 공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타국에서 그의 삶은 고달프고 비루했다. 결국 1943년 10월 25일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쓸쓸히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삶은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무장 투쟁의 역사였고 멸사봉공 그 자체였다.  

김영삼 정부부터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보수와 진보 정권 구별하지 않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해서 단절의 역사가 아닌 일본 강점기에서 계속된 민족정신의 정체성을 드높이려 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과 외교 문제 등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 27년 만에 유해가 봉환되었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 - KTV

■ 역사 인식의 천박함을 드러낸 국방부 대변인과 기자와의 설전

지난 29일 국방부 대변인 브리핑에서는 난데없는 역사 논쟁이 있었다. 국방부 전하규 대변인과 SBS 김태훈 국방 전문기자 사이에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역사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역사 논쟁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기자의 거의 일방적인 역사 강의 수준이었다. 

김태훈 기자는 전하규 대변인에게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을 평가한다고 하고서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포문을 열고 난 후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1920년대 레닌의 공산당과 한국전쟁을 일으켰던 스탈린의 공산당은 현재 윤정부과 문재인 정부와의 차이 보다도 크다며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전력을 문제 삼는 것은 역사 인식의 천박함에서 비롯됨을 지적했다. 

또한 1912년 태생의 김일성과 1920년대 빨치산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한국 전쟁 이후의 빨치산과 러시아어 파르티잔에서 비롯된 1920년 빨치산은 근본이 다른 것임을 강조했다. 홍범도 장군이 빨치산으로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도 반문하기도 했다. 김기자는 국방부가 역사 논쟁에 참여하더라도 치열하고 정확하게 참여하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외에도 1921년 자유시 참변에 관련해도 홍범도 장군은 무관하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학자들의 의견만 반영해서 일각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자유시 참변 연관성을 부각해 홍범도 장군을 폄하하려는 시도가 자행되고 있다. 완벽한 증거도 없이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뚜렷한 자료가 있는 홍범도 장군을 격하시켜서 우리가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현 정부와 역사 논쟁을 일으킨 세력들은 답해야 할 것이다. 

국방부 전하규 대변인과 기자와 설전 -SBS 보도

■ 역사 논란의 정점에 실용보다 이념을 강조하는 현 정부의 기조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5명의 독립투사의 흉상 철거 및 이전뿐만 아니라 최근에 이종석 국방부 장관의 홍범도함 명칭 변경 검토까지 난데없는 역사 논쟁의 정점에서 현 정부가 있다. 윤대통령은 29일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해 실용보다는 이념이 중요하다면서 최근 역사 논쟁의 정점에 정권 최상층부가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1+1=100이라고 말하는 반국가세력과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윤대통령은 독립의 역사보다는 반공 이념의 역사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임을 천명했다. 그래서 현 정부 하에서는 친일파였지만 한국전쟁에 공적이 있는 백선엽의 삶이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비루한 삶을 자처했던 홍범보 장군의 삶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것이다.  

팍팍한 경제 여건으로 힘든 국민의 삶보다, 희망 없는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삶보다 철 지난 이념의 논쟁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실익이 무엇인가?

29일 국민의 힘 연찬회에서 실용보다 이념을 강조하는 윤대통령 - KBS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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