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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 솔직 후기 - 성웅의 죽음을 욕보인 영화

bonanza38 2023. 12. 22. 01:14

노량해전은 엄청난 전과를 거두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쟁이었음에도 성웅 이순신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전쟁이어서 혹자는 대첩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그런 주장은 어패가 있다. 명량 해전 또한 판옥선 13척(12척으로 알려졌으나 뒤에 수리된 한 척 추가)으로 적군 133척을 궤멸시킨 엄청난 전과를 올렸지만 대첩보다는 해전으로 불린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 중 유일한 해전인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학익진 전법을 사용해서 왜군에 궤멸적 패배를 안겨주어 사흘동안 100여 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대첩으로 조선 수군이 남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임진왜란의 물줄기를 바꾸었기 때문에 한산도 해전이 대첩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해전과 대첩을 구별하는데도 역사는 너무도 엄격한 접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성웅 이순신의 대첩과 해전을 나열하는 이유는 죽음을 통해 조선을 지키고, 장차 침략에 대처하는 저항의 역사를 만든 성웅 이순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선행되지 않고는 함부로 역사적 소재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는 성웅 이순신의 죽음을 욕보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술이라는 미명아래 일천한 역사 인식을 노정했다. 

 

7년 전쟁을 성웅 이순신의 죽음으로 매조지하는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영화는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최악의 극화(dramatizging)를 선택했다. 지략가인 성웅 이순신이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판단력을 상실한 채 총을 맞는 최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끝까지 합치되지 않는 3원 방송처럼 조선, 명, 왜를 어쭙잖게 모두 조명하려는 시도가 세계 모든 시네필을 위한 영화도 아닌 그렇다고 한국영화도, 중국영화도, 일본영화도 아닌 설익은 밥 같은 영화가 되어 버렸다. 

 

또한 영화는 많은 소재를 마지막 해전 시퀀스를 위해 무의미하게 낭비한다. 때로는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관객들에게 이해하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거기에 게으른 편집과 상투적인 음악도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잘못된 극화를 실제로 받아들여 성웅 이순신에 대한 잘못한 편견이 관객들에게 심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웅 이순신은 그가 직접 쓴 '난중일기'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정사의 연장선에서 훼손을 최소화한 극화를 시도해야 하는 어려운 소재이다.

 

감독은 이순신이라는 어려운 소재를 어설픈 자신감으로 함부로 다루었다. 그래서 성웅 이순신을 욕보이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과감하다 못해 무리한 시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혹자는 필자의 비판을 예술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재비판할 것이다. 만약 감독이나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라면 그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서 대가 없이 사용하려면 감독이나 작가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순신의 죽음은 노량 해전이 끝났던 1598년 12월 16일 끝난 것이 아니다. 이후 계속되었던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저항했던 수많은 독립투사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지금 이 순간 침략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정복 야욕을 멈추지 않은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웅 이순신의 죽음은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용기의 지표를 시공을 초월하며 제공한다. 그에 반하는 어떤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이를 폄훼하는 어떤 시도도 배격하어야 한다.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던 상관없이 그 결과가 성웅 이순신의 고귀한 죽음을 욕보인 영화라고 비판한 것에 대한 또 다른 어떤 비판도 수용한다. 그 귀결이 침략에 저항하는 정의의 사도로서 올바른 이순신의 정의로 향하기를 기원한다. 

 

■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 - 성웅의 죽음에 대한 최악의 극화(dramatizing)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 - SBS 문화현장

노량 해전에서 성웅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기록들이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자살설이나 은둔설과 같은 음모론까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정사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통해 이순신의 최후를 엿볼 수 있다. 

선조수정실록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32권 내용 국역

'유정이 순천의 적영을 다시 공격하고,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그들의 구원병을 크게 패퇴시켰는데 순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에 행장이 순천 왜교에다 성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물러가지 않자 유정이 다시 진공 하고, 순신은 진인과 해구를 막고 압박하였다. 행장이 사천의 적 심안돈오에게 후원을 요청하니, 돈오가 바닷길로 와서 구원하므로 순신이 진격하여 대파하였는데,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웠고 죽이고 노획한 것이 무수하였다. 남해 경계까지 추격해 순신이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날아온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성웅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 위와 같이 기록한다. 

이순신 장군은 지리적 여건으로 조선 민족을 수없이 침략하는 왜에 대해서 직시하고 있었다.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왜의 잔당을 모조리 무찔러서 후한을 최소화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처절하게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한 이순신 장군을 기록한 정사의 한 자 한 자를 읽으며 오히려 영화보다 더 큰 감동을 느낀다.

 

이 밖에도 이순신 장군의 최후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류성룡 '징비록'에도 이순신 장군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몸소 활을 쏘다 왜적의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기록 때문에 역사적 오해가 이어진 듯하다. 

"옷으로 시신을 가리고 북을 치며 진격했다. 군사들이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라고 용기를 내어 공격했다."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는데 송희립이 총을 맞자 자리에 일어서다 이순신 장군이 총을 맞았다고 나온다. 이후 송희립이 기와 북을 잡고 독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이순신 장군이 북을 잡고 독전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마치 말이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갑자기 주어가 바뀌는 왜곡이 나타나는 것처럼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기록에도 이런 왜곡이 등장한다. 

 

이순신 장군이 돌격북을 치며 싸움에 맞서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이순신 장군 사후 80년 후 조선 숙종 시대 대제학 이민서의 '김 충장공(의병장 김덕령) 유사'에 나온다. 

 

이 기록을 KBS 역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차용해서 돌격북을 치다 총탄을 맞은 이순신 장군의 최후가 그려진다.  

불멸의 이순신 - KBS 드라마 클래식

 

정사가 아닌 야사를 채택한 '불멸의 이순신'에 대해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이 장면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돌격북을 치지 않는다. 

 

일련의 시퀀스가 조선을 더 이상 침략하지 못하도록 죽음을 무릅쓰는 장군의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일면 수긍가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에서 그린 이순신 장군의 최후는 지금까지 이 장면을 다룬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의 극화(dramatizing)보다 최악의 선택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해 온갖 음모론(자살설, 은둔설)보다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을 한 것이다.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긴박한 전장 한가운데에서 감상에 빠진다. 자신과 같이 전투하며 사라진 전우들을 떠올리며 판단력을 상실한 사람처럼 멍한 모습으로 감상에 젖는다.

 

그 가운데는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영화 내내 왜군을 포위하며 퇴각을 막은 이유를 장군의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이라는 사사로운 원한에서 기인한 것임을 암시했는데, 장군의 최후의 장면에서 환영을 통해 더욱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명 장수 진린이 이면을 죽인 왜군을 잡아 오지만 꿈에서 본 사람이 아니라며 직접 죽이지 않는 장면으로 이순신 장군이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만 죽음의 순간 다시 이면을 등장시켜 결국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무릅쓴 헌신을 사적 감정의 발로로 격하시켰다.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서 돌아와 공적 감정을 순화하며 회환을 기록한 '난중일기'의 감상을 긴박한 전장 한가운데 도입한 것은 감독의 천박한 역사 인식의 반증이었다. 

 

23전 23승의 전무후무한 해전사를 기록한 지략가 이순신이 전장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과 징비록에서 보여 주듯이 왜의 침략성을 인식하며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공적 감정이 극대화한 결과로 다시는 이 땅에 침략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연출되어야 했다.  

 

물론 필자의 주장이 무조건 맞다고 강변할 수는 없다. 다만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묘사한 성웅 이순신의 최후와 필자가 제시하는 성웅 이순신의 최후에 대한 변증법적인 고찰이 또 다른 걸작 이순신 영화가 창조되는 밀알이 되길 소원할 뿐이다. 

 

그런데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와 이순신 장군을 다룬 '명량', '한산'을 포함한 3부작은 단순히 역사적 인식의 측면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끝까지 합치되지 못한 3원 방송 같은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

영화 '노량'뿐만 아니라 전작인 영화 '한산'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영화 '한산'은 한국 영화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영화 절반 정도의 대사를 일본어로 소화한다. 단순히 일본어가 문제가 아니다. 침략의 역사에 대한 어떤 사관도 없이 중립적 공영방송 보도처럼 양적 균형을 이루려고 시도했다. 

 

영화 '노량'에서는 조선, 명, 왜라는 3원 중계방송을 보는 듯했다. 영화 내내 3원 방송은 합치되지 않았다. 

이순신(김윤석 분), 시마즈(백윤식 분), 진린(정재영 분) 등 조선, 왜, 명 세 장수를 치우침 없이 다루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의 한 궤를 어쩔 수 없이 담당한 세 장수를 다루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통 한국 식당에서 일본과 중국의 전통 음식을 맛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한중일 세 나라 시네필 모두를 만족할 수 없는 죽도 밥도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더 쉽게 예를 든다면 일본 영화에 출연하는 일본 배우가 한국말로 연기를 한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일본 배우가 한국 사람처럼 분장을 하고 "안녕하시모니까?"라고 발음하며 한국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는 모습에서 한국영화팬들은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가?

 

영화 '나폴레옹'에서 프랑스 사람이 영어를 쓰는 생경한 접근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이 극에 몰입할 수 없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잡한 외국어 구사 능력으로 많은 분량을 처리한 영화를 관객들에게 강요한 감독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영화를 미국에서 개봉한다는 뉴스 보도를 접하면서 이 영화의 시도가 전 세계 시네필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영화 '노량' 주인공들 - KBS 뉴스

 

관객의 인내심을 강요하며 게으른 선택을 한 영화 '노량' & 평점

이 영화 후반부는 지루할 정도로 지속되는 해전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참 자고 일어나는데 똑같은 장면이 반복하고 있었다는 댓글 달 정도로 마지막 시퀀스가 장황하다. 

 

이 장면을 위해 다른 장면들은 그냥 의미 없이 낭비되는 느낌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그의 죽음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면은 역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일본 역사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고 영화 '노량'에서 필사적으로 왜군이 철군하려는 기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권력이 넘어가는 일본 국내 사정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일반적인 관객은 알 수 없는데 영화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관객들에게 그냥 보라고 강요한다.

 

영화 흐름 또한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다. 갑자기 화면이 바뀌면서 긴장감 넘치는 음악으로 관객들을 이끌어가는 편집과 상투적 음악도 게으른 선택의 연속이었다. 

 

최근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의 파급력에 대해 새삼 놀라곤 한다. 영화 '노량'을 보면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성웅 이순신에 대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적의 총탄을 자초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두렵다. 

 

성웅 이순신은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분투하다가 죽음으로써 정의의 지표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의 숨결은 지금 이 순간 독도를 침탈하고 일제 강점기 때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세력들에게 강한 대항력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런 진중한 역사적 의미를 다루기에는 영화 '노량'은 너무 부족하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사관의 부재를 용인하라는 것은 매우 무책임하고 비겁한 행위이다. 그런 연유로 이 영화에 대해 무책임하게 대충 평점을 줄 수는 없다. 

 

공짜로 쓰는 역사적 소재에는 반드시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창작자들은 인식했으면 한다. 

영화'노량:죽음의 바다'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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